고종과 흥선대원군이 머문 공간, '운현궁'에 얽힌 이야기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3.04.26. 16:57

수정일 2023.04.26.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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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
운현궁(雲峴宮)은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의 저택이다
운현궁은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의 저택이다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45)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1863년 12월 고종(高宗:1852~1919, 재위 1863~1919)이 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26번째 왕이 되었다. 철종의 후계자를 둘러싼 경쟁 속에 고종이 왕이 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아버지 이하응(李昰應:1820~1898)의 영향력이 컸다.

왕위 계승의 결정권을 가진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신임을 얻은 이하응은 마침내 아들을 왕으로 올리는데 성공했고, 최초로 살아있는 대원군(왕의 아버지를 칭하는 호칭) 시대를 열었다. 운현궁고종이 태어나서 자란 잠저(潛邸: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이자, 흥선대원군이 정치적 야망을 실현시킨 공간이기도 했다.

운현궁이라고 이름을 지은 까닭?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사저이자, 고종의 잠저였다. 운현궁이라는 이름은 안국동에서 창덕궁 쪽으로 향하는 나지막한 고개의 이름인 ‘운현(雲峴)’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이 고개는 천문 관측을 하던 서운관(書雲觀: 세조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서운관이라고 부르기도 했음) 앞에 있었는데, 서운관의 명칭을 따서 ‘운관 앞의 고개’를 뜻하는 ‘운현’이라고 부른 것이다.

고종이 왕의 자리에 오른 뒤에는 이곳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증축하였다. 운현궁이 준공되었을 때, 고종은 대왕대비(신정왕후)와 왕대비(철인왕후)를 모시고 운현궁에서 낙성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때, 고종은 “자전의 행차가 영광스럽게 나의 저택에 들르시니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경축하는 마음 한량없다. 오늘 상하가 화합하고 즐기는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으니, 노락당기문(老樂堂記文)을 대제학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고 현판을 달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선비와 소년들에게 임시과거시험을 보게 하고 선비 50여 명과 소년 497명을 선발해서 시상하는 등 운현궁의 준공을 축하한 모습이 『승정원일기』, 1864년(고종 1) 9월 24일의 기록에 보인다. 

운현궁이 증축되어 규모가 가장 컸을 때는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와 옛 TBC 방송국, 일본문화원, 그리고 교동초등학교 일대까지를 포함하였다. 궁궐에 필적할 만큼 크고 웅장하였던 공간이었던 것이다.
운현궁의 안채인 이로당은 두 노인이 산다는 뜻을 담았다
운현궁의 안채인 이로당은 두 노인이 산다는 뜻을 담았다
이로당에서 노락당까지 연결된 복도
이로당에서 노락당까지 연결된 복도

이때 4개의 대문도 갖추어졌는데, 여기에는 고종이 창덕궁에서 운현궁을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경근문(敬覲門)과 대원군의 전용 문인 공근문(恭覲門)도 포함되었다. 아재당(我在堂), 노안당(老安堂), 노락당(老樂堂), 이로당(二老堂), 영화루(迎和樓) 등의 건물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恩信君)과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을 모신 사당도 세웠다.
철종 초 관상감에서 성인이 난다는 민요가 있었고
운현궁에서 왕기가 있다는 말이 떠돌았다. 
그 후 지금의 주상이 탄생했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관상감의 또 다른 이름은 서운관이다. 그러나 지금 주상의 잠저가 바로 옛날 관상감의 터이므로 운현궁이라고 한다. 철종 초에 경성에서는 관상감에서 성인이 난다는 민요가 있었고, 또 운현궁에서 왕기가 있다는 말이 떠돌아다녔는데 그 후 지금 주상이 탄생하였다. 그가 등극한 후 대원군 이하응은 이 터를 다시 넓히고 새로 단장하여 주위의 담장이 수리(數里)나 되었고, 네 곳에 대문을 설치하여 대내(大內)처럼 엄숙하게 하였다.”고 하여 운현궁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증언하고 있다.

흥선대원군, 개혁정치의 칼을 뽑다

운현궁은 무엇보다 흥선대원군 정치 활동의 중심 공간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서원 철폐를 비롯하여 경복궁 중건, 호포법(戶布法) 실시 등 개혁정치를 단행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1863년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한 후, 흥선대원군의 차남 재황(載滉, 아명은 명복(命福)에게 계승되었다. 60여 년간 세도를 누렸던 안동 김씨의 정치적 실권자들은 경악했다.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와의 밀약 속에 고종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바로 섭정(攝政) 체제로 들어갔고, 바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척결에 나섰다. 19세기 초, 중반 60년 동안 세도정치의 본산으로 기능을 하였던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켰다.

1865년에는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의 사당 만동묘(萬東廟)를 철폐하고, 당쟁의 온상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전국의 서원 중 사액서원 47곳을 제외한 서원을 모두 정리하였다. 유림(儒林)들의 저항이 심했지만 대원군은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내가 용서하지 못한다.”는 확신에 찬 논리로 유생들의 기를 꺾고 정국을 돌파해 나갔다.
경복궁 중건 사업은 흥선대원군의 최대 역점 사업이었다.
경복궁 중건 사업은 흥선대원군의 최대 역점 사업이었다.

경복궁 중건 사업은 흥선대원군의 최대 역점 사업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270여 년 이상 폐허로 방치된 경복궁의 중건을 통하여 왕실의 위상과 권위를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흥선대원군은 호포법을 실시하여, 양인들에게만 부담하던 군포를 호포(戶布)로 개칭하여 양반들에게도 군역의 의무를 부과하는가 하면, 고리대로 변질이 된 환곡제를 폐지하고 백성들이 쉽게 곡식을 빌릴 수 있는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하여 농민들의 안정된 생활을 추구하게 하였다. 대원군의 참신하고 적극적인 개혁정치의 구상은 대부분 운현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고종과 명성황후, 운현궁에서 혼례식을 하다

흥선대원군 권력의 중심 공간 운현궁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혼례식이 이곳에서 거행되면서, 더욱 그 위상이 높아졌다. 1866년 고종의 혼례가 결정되자 조대비(신정왕후)는 별궁(別宮)으로 운현궁을 지정하였다. 이전까지 어의궁(於義宮)이 별궁으로 사용되었는데, 흥선대원군을 자신의 사저에서 왕의 혼례식을 실시하도록 한 것이었다.

당시의 혼례식 과정을 기록한 의궤인 『고종명성황후가례도감의궤(高宗明成皇后嘉禮都監儀軌)』에 의거하면, 1866년 1월 1일부터 12세에서 17세에 이르는 전국의 사족 처자들에게 금혼령이 내려졌다.
고종과 명성황후 가례 재현
고종과 명성황후 가례 재현

간택은 2월 25일부터 시작되어 이날 오시(午時:12시경)에 초간택이 창덕궁 중희당에서 거행되었다. 후보 처자들은 분은 발라도 좋으나 얼굴에 붉은색을 칠하지는 말라는 분부에 따라 가볍게 화장하고 간택에 임했다. 초간택서 5명이 선발되어 재간택에 나갔고, 재간택은 2월 29일에 역시 중희당에서 거행되어 민치록의 딸이 최종적으로 낙점되었다. 삼간택까지 가지 않고 재간택에서 왕비 후보를 정한 것은 이미 후보감이 내정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승정원일기』에는 “1866년(고종 3) 3월 21일 마침내 운현궁에서 혼례식의 가장 중요한 의식인 친영(親迎:별궁에서 신부 수업을 받고 있는 왕비를 궁궐로 모셔오는 의식)이 행해졌다.”고 전한다.

당시 혼례식의 화려함은 82쪽에 달하는 화려한 채색 친영 반차도(班次圖)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종전에 판화 기법으로 그린 것과 달리, 이 반차도는 모두 수필(水筆)로 그렸다. 다른 반차도와 특히 다른 점은 왕의 행렬 끝부분인 38면에 종부시 사령 2인과 권두(權頭) 2인을 앞세우고 대원위(大院位) 교자(轎子)가 새롭게 등장하고, 왕비 행렬의 거의 마지막 부분인 78면에는 부대부인(府大夫人) 덕응(德應:가마)이 등장하는 것이다. 대원군과 그 부인의 가마가 등장하는 것은 혼례식에서 대원군의 위상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고 있다.
노락당을 관람하는 시민들
노락당을 관람하는 시민들

친영 의식은 노락당(老樂堂) 건물에서 치러졌는데, 노락당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써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 때 주로 이용된 공간이었다. 노락당의 현판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깊은 신임을 받았던 무신 신헌(申櫶)이 썼다. ‘노락당기문’에서 “노락당이 굉장히 높아 하늘과의 거리가 한 자 다섯 치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에서도 노락당의 호화롭고 웅장함을 짐작할 수 있다. 노락당에서는 현재에도 고종과 명성황후의 혼례식 행사를 재현하고 있다. ☞2023 고종 · 명성후 가례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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